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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자기계발] 무척 더웠던 그 여름

최강일
2004.06.07 15:38 1,36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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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치는 월요일 아침 세탁소에 도착해서 간단히 인사를 한 후 주인 아저씨 옆에 서서 손님들의 옷을 어떻게 찾아 패킹을 해서 주는지, 그리고 맡기는 옷은 어떻게 레이블을 붙여 놓는지를 배웠다. 그러나 아침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주인 아저씨가 데스크를 보고 강치는 주로 패킹을 해서 데스크로 가져 다 주는 일을 했다. 정신없이 아침시간을 보내고 10시쯤 되자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재봉으로 옷 고치는 일을 하고 잠시 후 하이티 친구가 춤추는 걸음거리로 귀에 해드폰을 끼고 흔들면서 가게문을 들어선다. 약간 한가해진 틈을 타서 옆집에서 아주머니가 커피를 사다 준다. 그 후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커피가 없었던 것을 봐서 말은 안 해도 강치 첫 출근을 환영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짧은 커피 브레이크, 역시 한가해지니까 한국 사람들 좋아하는 족보 따지기가 시작됐다.. 서울서 집은 어디인지, 학교는 어딜 나왔는지, 어디 하나라도 걸리기를 바라던 눈치시던 아저씨가 경복을 나왔다는 말에 눈이 반짝하신다. “그래? 그 근처에 왜 배화여고 알지. 거기서 내가 국어 선생이었어.” “아 그러세요. 저희 육촌 아저씨도 중대부고 국어 선생님이신데..” 그러자 주인 아저씨 반색을 하시면서 “그래! 이름이 뭔데?” 그때서야 강치는 자신이 실수를 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최을선..” “뭐라구. 야! 세상 좁구나. 을선이 나랑 대학 동창이야. 배화 전에 나도 부고에서 같이 가르쳤어. 그럼 자네가 을선이 조카야?” 너무나 반가와 하는 주인 아저씨에게 미국 온지 일년 됐다고 말한 것 다 들통 나겠구나 생각이 드는 강치는 같이 맞장구를 칠 수 가 없었다. sucks가 된 강치 표정을 주인 아저씨가 눈치 못 챈 건 ‘딩동’ 손님이 들어올 때 나는 차임벨 소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손님쪽으로 향하던 아저씨가 뒤 돌아보면서 “Mr. 최! 저 손님 자네가 받아봐” “제..제가요?” “응, 그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강치는 손님에게 다가섰다.

크게 호흡을 하고 “Yes, Sir. May I help you?” 강치의 첫 손님은 아침 내내 들끓던 말쑥한 차림의 손님하고는 약간 달라 보였다. 간단히 얘기해서 전혀 Dry Cleaning할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아니 거의 거지 차림이었다. 아니 썩은 냄새가 나는 거지였다. 한걸음 물러나 있는 주인 아저씨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찌됐던 배운 대로 옷을 받던 강치는 더 기가 막혔다. 양복이나 와이셔츠가 아니고 런닝 셔츠와 팬티 조각이었다. 강치는 주인 아저씨를 쳐다보고 물었다. “이거 얼마 받습니까?” 가격표에 없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셔츠 값 받아.” 대답하는 아저씨가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살인적인 냄새를 참느라 숨을 안 쉬고 거지 손님에게 옷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건네 주고 제발 빨리 좀 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Good Bye”를 했다. 뭐라고 자기 혼자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던 거지 아저씨가 가자 주인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강치가 받아 논 옷을 집게로 들어 드라이클리닝 머신이 아닌 물 세탁하는 기계에 집어넣다. 되게 신고식을 치룬 강치는 그나마 큰 문제없이 넘어간 사실에 안도했다.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옷을 빨고 다리는 일이 시작됐다. 주인 아저씨가 일러 준대로 기계에 빨래를 넣은 후 기계가 서자 빨래를 꺼내 드라이어로 넣을려고 기계문을 열었다. 그 순간 강치는 강력한 마취약 같은 퍼크 냄새에 휘청했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얼른 달려와서 강치를 붙잡으며 “빨래를 꺼내 드라이어에 넣을때는 숨 쉬면 안돼” 소리치듯 말했다. 아까 거지 아저씨의 냄새를 일거에 제거해준 퍼크 냄새에 강치는 정신이 없었다. 아침 출근 후 처음으로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그 사이 말려진 빨래를 하이티 친구가 다리미질을 하기 시작했다. 강한 수증기로 옷을 먼저 편 후 김을 품어대는 다리미 기계로 다리미질을 하는 하이티 친구의 손놀림이 바삐 움직인다.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뜨거운 열기가 확 느껴졌다.

이렇게 어떨 결에 시작한 세탁소 일은 강치가 처음 걱정했던 영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전화를 받는 일이 조금 어려웠지 손님과의 영어는 비교적 간단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에어컨을 설치할 수 없는 세탁소에서 뜨거운 김과 휘발성 강한 퍼크와의 싸움은 강치로 하여금 태어나서 가장 덥고 힘든 여름이 되게 하였다. 매일 일이 끝난 후 강치는 계획했던 공부는 고사하고 처음 한 주일은 다리가 아파서 그것이 좀 나아진 후에는 하루종일 흘린 땀으로 인해 녹초가 되었다. 퇴근 후 에어컨 바람 밑에 누운 강치는 머리가 텅 비고 매일매일 단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공부를 하다 잠을 자면 아직도 계속 돌아가는 뇌를 재우기 위해 더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곤 했는데 힘든 일을 한 후의 뇌는 그냥 텅 비어 있는 듯 하면서도 아무런 input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강치는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하루일과를 마친 후 소주를 마시고 잠을 청하는 심리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이렇게 1984년 뉴욕 메츠 야구가 승승장구하던 그 뉴욕의 여름은 강치에게 무척 더웠던 여름으로 기록이 되었고 그 지긋지긋한 경험은 이후 유학생활 동안 여름 아르바이트로 다시는 세탁소는 택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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