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칼럼] 마음의 양식 1 - 독서란
박성래
2004.05.2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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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독 서 란
독서란 지식의 습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思索(사색)과 思惟(사유)즉 생각할 수 있는 心性(심성)을 기르는데 있는 것이다. 곧 자기만이 옳다는 독단을 피하고 지식의 보편성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겸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경솔하고 방정맞듯 곧 경망하게 되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안전하지 못하고 위태롭다는 말이다. 독서에서 얻어진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실제 생활에 구현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이다.
독서란 책을 매개로 한 독자와 저자와의 만남이 된다. 이와 같이 교류작용이 바로 독서의 행위이며 이러한 교류 속에서 독자는 자기 발전의 바탕을 마련한다. 독자는 책을 읽은 후 여러 가지 느낌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러한 느낌의 진통이 얼마나 크느냐에 따라서 저자와의 접근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두문불출 책에 파묻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엄밀히 말하면 그는 여러 사람과 만나고 있는 셈이다. 즉 혼자 있는 것 같지만 저자를 만나서 공감하고 비판하고 때로는 싸우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책과 함께 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독자에게는 하나의 작품과 저자에 가까워지려는 능동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능동적인 자세로 저자의 사상과 그의 철학의 깊은 곳에 침식될 때 진정한 독서가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다독보다는 정독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국가가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자”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과 같이 책이 무엇을 주느냐에 집중하기보다 저자라는 손님을 직접 초대하여 진정한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겠다는 능동적인 자세가 독서에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을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독서는 교양의 수준을 높여주고 미지의 세계를 열어 사고의 폭을 넓히는 일을 통해 더욱 인간을 성숙되게 한다. 또 한 권의 전기를 통해 한 인간의 역경과 희로애락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확장시켜준다. 그 속에서 그들의 슬픔과 기쁨 고통을 함께 느끼며 선과 악, 이성과 감정, 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배우게 된다. 특히 종교와 철학서적을 탐독함으로 삶의 진정한 의미와 만나게 되고 자신의 인생행로를 선택하게 된다. 책이란 마치 햇빛이나 공기와 같이 우리의 주위에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에 그 존재자체를 새삼스럽게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햇빛이 없다면?, 공기가 없다면? 어느 날 갑작이 책이 사라져버린다면 하는 생각을 상상해 보시라.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그 가까움을 실감하지 못한다. 한 남자의 가치관은 그 사람이 어떤 서재를 구비했느냐에 그 집안의 가풍을 형성하고 뼈대를 연결한다. 그 집안의 서재야말로 그 집 주인의 높은 인품과 정갈한 생활태도 그의 정돈된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돈이 가득 찬 지갑보다, 책이 가득 찬 서재를 가지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승패는 兵家常事(병가상사)라 즉 실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니 낙심 할 것 없다는 뜻이다. 승자와 패자의 한 가지 차이점은 승자는 패배를 거울삼아 자신의 단점을 고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능력을 잘 활용해 다시 재기한다. 그러나 패자는 배우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패자는 똑같은 실수를 자꾸 되풀이 하게 된 다. 실패란 것이 결코 즐거울 리가 없겠지만 패배라고 해서 한결같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견딜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책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지 못할망정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므로 책에서 배우고 책을 통해 견딜 수 있는 힘을 키워야한다. 사람들은 설사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실패 할 경우의 심적 부담이 너무 커서 감히 엄두를 못 내듯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점을 치러 가는가? 신세한탄하며 술독에 빠지는가? 당신의 스승이요 애인이요 안내자인 책에서 당신의 길을 찾아야한다. 우리는 흔히 잘못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찰리부라운 만화에 페티가 찰리에게 전화한다. “나 낙제 했어 찰리, 한 학년 못 올라간데, 낙제했다고.” “이것이 다 네 탓이야, 찰리” “뭐! 내 탓이라고”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 필요하단 말야.” 페티 같이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경우에 따라 편한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산다는 것, 즉 인내다. 견길 수 있는 힘을 주는 책과 가깝게 하자. 인내가 없이는 책도 읽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책 저책을 넘기는 “유식한 바보” 들이 많이 있다. “책만들고 있을 뿐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먹기 만하는 뚱둥보 대식가와 같은 것이다.”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바보 이야기가 있다. 한 주인이 종에게 생선 100마리를 사오라고 한다. 미련하게도 썩은 고기를 사온 종에게 화가 난 주인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볼기 100대를 맞겠냐? 100마리 썩은 생선을 먹겠느냐? 아니면 100량을 내놓겠느냐? 어리석은 종이 생각한다. 썩은 고기를 먹기로, 반쯤 먹다보니 도저히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 볼기 100대를 맞겠다고 한다. 그 역시 매를 맞다보니 더 이상 못 맞겠어, 100량의 돈을 갚았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3가지 매를 다 맞았던 것이다. 이 비유는 애급의 바로 왕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이야기한 것이다. 독서에도 이것저것 읽어 내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서의 요령 10가지가 있다. “맛을 보고 삼켜야할 책이 있고 씹어서 소화시켜야할 책”이 있다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책을 읽는 지혜를 생각하면서 독서를 시도해 보자.
① 요점을 생각하면서 ② 그 요점을 요약하면서 ③ 그리고 문맥을 집어가면서 ④ 순서에 입각해 구성을 생각하면서 ⑤ 정경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⑥ 인물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⑦ 인물의 성격을 생각하면서 ⑧ 중얼거리면서 소리 내어 읽는다. ⑨ 한편감상을 하면서 ⑩ 주제와 요지를 독해하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읽는다
한 소년이 탐정 소설을 읽는다.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나 긴박해져 간다. 주인공이 거의 죽을 처지에 노이게 까지 전개 되어 간다. 소년은 급한 마음에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읽는다. 역시 최후의 승리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그는 읽기 시작한다. “최후의 승리”를 믿으면서 안심한다.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는다는 확신은 지금 겪는 불확실성의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있다. 어떤 상황에도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그런 역사의 주인공이 우리의 삶을 책임진다면 우리는 불안한 미래 앞에도 안심할 수 있다.
최후의 승리를 보장하는 밝은 미래의 주인공 그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 예수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미래를 보장받는 확실한 보험의 약속이 있다. 이것이 믿음이다. 글마다 “희망 찬 새해”가 밝았다고 외치지만 사람들은 불안하다. 환경도, 경제도, 건강도, 무엇보다 기본적인 경제가 흔들릴 것 같아 불안하다. 그렇다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생존과 성공의 비결이 무엇일까?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브 코비 박사는 원칙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원칙의 중심이란 성실, 근면, 검소, 신용, 정직, 팀워크 등 같은 원칙이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가장 잘 나열되어 있는 책이 성경이다. 이 책은 수만은 사람을 변하게 했으며 인류역사를 이끌어온 살아 있는 동력이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다. 믿음이 있는 싸움은 희망이 있다.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 일 때도 온몸 던진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다. 벼랑 끝에도 희망이 있듯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당신의 문제의 정답을 책에서 발견하자. 인간이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성경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사랑으로 연대하여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고 이끌어가는 당당한 주역이 되자.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천상병씨의 歸天(귀천) 이란 시가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는 이 세상을 소풍 왔다고 생각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삶이 마치 소풍 온 듯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에게 돌아갈 하늘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한편으로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아야한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인생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고 인간을 무뢰하게 만든다. 방자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죽음을 기억해야 인간은 진정한 지혜자가 되고, 겸손한 인간으로 바뀌어 질수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참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헛된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성경(골 3:2)에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전도서)한다.
서기 79년 8월24일 폼페이를 순식간에 덮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폭발이 일어나기 전부터 종종 연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품고 있었던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한다고 낭만적인 생각을 했을 것이다. 16년 전 폭발한 사실에 대해서 이미 사람들 머리에서 잊어졌던 것이다. 충분히 대피 할 수 있었건만 그들은 무관심했거나 너무 무지했던 것이다.
드디어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산이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순식간에 폼페이 최후의 날을 맞이했던 것이다. 화산 폭발의 전조를 보면서 무심했던 폼페이 시민들처럼 오늘날 지구촌의 시민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가는 현상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무방비 상태로 최후의 날을 맞이한 폼페이 시민들의 끔찍한 불행이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찌 재현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봄페이의 최후의 날을 통해 죽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스콜브 목사님의 글 중에 죽음의 연습이란 것이 있다. 청년 때 죽음의 연습은 정욕에 빠지지 않게 해주며, 중년 때 죽는 모습의 연습은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지 않게 해주고, 노년 때 죽음의 연습은 그로 하여금 거룩한 삶 가운데서 죽음 을 맞이할 수 있게 해준다. 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삶을 살찌게 하고 영혼을 부유하게 하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양식이 되고, 삶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오늘도 열심히 “마음의 양식”을 준비하고 있다. 천상병 시인과 같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므로 삶을 풍성케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 왜냐하면 이는 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독서할 시간을 가지자. 삶을 풍성케 하는 지혜의 샘이기 때문이다. 명상의 시간을 가지신다면, 이는 기운을 북돋아주는 청량제가 된다. 기도의 시간을 가지자. 중국의 철학자 구양수의 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은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들을 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은 변화시킬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누구나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인생을 살면서 거창한 꿈을 꾸게 된다. 가족 기업 그 민족 그리고 세계가 그의 꿈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원대한 꿈이 개인 삶의 변화로부터 된다는 사실에는 별로 익숙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죽음을 앞둔 어떤 사람의 글이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를 넘었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네, 그래서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지.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에게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지.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어있는 나는 문득 깨달았다 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었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이네,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좀 더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 것을 이 세상 모든 변화는 내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네. 아름다운 이 세상을 원하는가? 나 자신이 먼저 변하자. 그리하여 가족이 변하고 내 주위가 변하여 나라가 건전해져 가는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들자.
우리의 변화와 성숙을 어렵게 하는 것은 습관의 타성에 빠진 우리의 게으른 모습 때문이다. 시인 천상병씨 같이 이 세상 소풍 왔다고 생각하자. 다시 말해 소풍 온 기분으로 삶을 즐기자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던 내가 어디에 있든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살 때, 이때 새로운 변화를 시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돌아갈 하늘이 있다는 희망을 갖고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는 밝은 미래의 주인공이 되자.
정직과 용기
진정한 참 용기는 어디서 생길까? 용기는 주머니 사정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고 풍요로운 생활속세서 용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돈 때문에 더 비겁해지고 초라해질 수도 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이 많다고 용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약해질 수 있다. 경험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자신이 없어질 수 있다. 환경이 좋다고 여건이 완벽하다고 해서 용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경우가 더 많아질 수가 있다. 오히려 환경이 어려워질 때 더 큰 용기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진정한 용기는 도덕성에 있는 것이다. 죄인에게 용기가 없다. 오직 정직만이 도덕성을 뒷받침한다. 양심의 가책속세서는 비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직의 결여로 용기마저 상실되는 안데르센의 작품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바 보
현명한 사람도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 그러나 바보란 그 경험을 통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적어 목록을 만단다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되풀이할 가능성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당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는 것은 당신은 바보가 아니라 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과소평가해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발휘 못하는 것이다.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못난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증거가 있어도 부정적인 자신의 모습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 승패는 兵家常事(실패하는 일이 흔히 있으니 낙심할 것 없다는 뜻)라고 한다. 승자와 패자의 한 가지 차이점은 승자는 패배를 거울삼아 자신의 단점을 고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으로 현실적응에 장애가 되는 자신에 대한 착각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능력을 잘 활용해 성공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패자는 결코 배우는 법이 없어 똑같은 실수를 자꾸 되풀이 할뿐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상대방을 존중하고(Respect), 보살피고(Care), 알고(know), 책임지는 것(Responsibility)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상대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이며, 상대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다. 즉 사랑은 받아주고 채워주고 덮어주는 것이다.
보람: 인간은 보람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일하는 보람, 고생하는 보람, 공부하는 보람, 애쓰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보람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독서란 지식의 습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思索(사색)과 思惟(사유)즉 생각할 수 있는 心性(심성)을 기르는데 있는 것이다. 곧 자기만이 옳다는 독단을 피하고 지식의 보편성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겸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경솔하고 방정맞듯 곧 경망하게 되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안전하지 못하고 위태롭다는 말이다. 독서에서 얻어진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실제 생활에 구현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이다.
독서란 책을 매개로 한 독자와 저자와의 만남이 된다. 이와 같이 교류작용이 바로 독서의 행위이며 이러한 교류 속에서 독자는 자기 발전의 바탕을 마련한다. 독자는 책을 읽은 후 여러 가지 느낌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러한 느낌의 진통이 얼마나 크느냐에 따라서 저자와의 접근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두문불출 책에 파묻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엄밀히 말하면 그는 여러 사람과 만나고 있는 셈이다. 즉 혼자 있는 것 같지만 저자를 만나서 공감하고 비판하고 때로는 싸우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책과 함께 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독자에게는 하나의 작품과 저자에 가까워지려는 능동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능동적인 자세로 저자의 사상과 그의 철학의 깊은 곳에 침식될 때 진정한 독서가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다독보다는 정독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국가가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자”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과 같이 책이 무엇을 주느냐에 집중하기보다 저자라는 손님을 직접 초대하여 진정한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겠다는 능동적인 자세가 독서에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을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독서는 교양의 수준을 높여주고 미지의 세계를 열어 사고의 폭을 넓히는 일을 통해 더욱 인간을 성숙되게 한다. 또 한 권의 전기를 통해 한 인간의 역경과 희로애락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확장시켜준다. 그 속에서 그들의 슬픔과 기쁨 고통을 함께 느끼며 선과 악, 이성과 감정, 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배우게 된다. 특히 종교와 철학서적을 탐독함으로 삶의 진정한 의미와 만나게 되고 자신의 인생행로를 선택하게 된다. 책이란 마치 햇빛이나 공기와 같이 우리의 주위에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에 그 존재자체를 새삼스럽게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햇빛이 없다면?, 공기가 없다면? 어느 날 갑작이 책이 사라져버린다면 하는 생각을 상상해 보시라.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그 가까움을 실감하지 못한다. 한 남자의 가치관은 그 사람이 어떤 서재를 구비했느냐에 그 집안의 가풍을 형성하고 뼈대를 연결한다. 그 집안의 서재야말로 그 집 주인의 높은 인품과 정갈한 생활태도 그의 정돈된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돈이 가득 찬 지갑보다, 책이 가득 찬 서재를 가지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승패는 兵家常事(병가상사)라 즉 실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니 낙심 할 것 없다는 뜻이다. 승자와 패자의 한 가지 차이점은 승자는 패배를 거울삼아 자신의 단점을 고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능력을 잘 활용해 다시 재기한다. 그러나 패자는 배우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패자는 똑같은 실수를 자꾸 되풀이 하게 된 다. 실패란 것이 결코 즐거울 리가 없겠지만 패배라고 해서 한결같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견딜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책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지 못할망정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므로 책에서 배우고 책을 통해 견딜 수 있는 힘을 키워야한다. 사람들은 설사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실패 할 경우의 심적 부담이 너무 커서 감히 엄두를 못 내듯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점을 치러 가는가? 신세한탄하며 술독에 빠지는가? 당신의 스승이요 애인이요 안내자인 책에서 당신의 길을 찾아야한다. 우리는 흔히 잘못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찰리부라운 만화에 페티가 찰리에게 전화한다. “나 낙제 했어 찰리, 한 학년 못 올라간데, 낙제했다고.” “이것이 다 네 탓이야, 찰리” “뭐! 내 탓이라고”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 필요하단 말야.” 페티 같이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경우에 따라 편한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산다는 것, 즉 인내다. 견길 수 있는 힘을 주는 책과 가깝게 하자. 인내가 없이는 책도 읽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책 저책을 넘기는 “유식한 바보” 들이 많이 있다. “책만들고 있을 뿐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먹기 만하는 뚱둥보 대식가와 같은 것이다.”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바보 이야기가 있다. 한 주인이 종에게 생선 100마리를 사오라고 한다. 미련하게도 썩은 고기를 사온 종에게 화가 난 주인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볼기 100대를 맞겠냐? 100마리 썩은 생선을 먹겠느냐? 아니면 100량을 내놓겠느냐? 어리석은 종이 생각한다. 썩은 고기를 먹기로, 반쯤 먹다보니 도저히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 볼기 100대를 맞겠다고 한다. 그 역시 매를 맞다보니 더 이상 못 맞겠어, 100량의 돈을 갚았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3가지 매를 다 맞았던 것이다. 이 비유는 애급의 바로 왕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이야기한 것이다. 독서에도 이것저것 읽어 내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서의 요령 10가지가 있다. “맛을 보고 삼켜야할 책이 있고 씹어서 소화시켜야할 책”이 있다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책을 읽는 지혜를 생각하면서 독서를 시도해 보자.
① 요점을 생각하면서 ② 그 요점을 요약하면서 ③ 그리고 문맥을 집어가면서 ④ 순서에 입각해 구성을 생각하면서 ⑤ 정경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⑥ 인물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⑦ 인물의 성격을 생각하면서 ⑧ 중얼거리면서 소리 내어 읽는다. ⑨ 한편감상을 하면서 ⑩ 주제와 요지를 독해하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읽는다
한 소년이 탐정 소설을 읽는다.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나 긴박해져 간다. 주인공이 거의 죽을 처지에 노이게 까지 전개 되어 간다. 소년은 급한 마음에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읽는다. 역시 최후의 승리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그는 읽기 시작한다. “최후의 승리”를 믿으면서 안심한다.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는다는 확신은 지금 겪는 불확실성의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있다. 어떤 상황에도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그런 역사의 주인공이 우리의 삶을 책임진다면 우리는 불안한 미래 앞에도 안심할 수 있다.
최후의 승리를 보장하는 밝은 미래의 주인공 그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 예수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미래를 보장받는 확실한 보험의 약속이 있다. 이것이 믿음이다. 글마다 “희망 찬 새해”가 밝았다고 외치지만 사람들은 불안하다. 환경도, 경제도, 건강도, 무엇보다 기본적인 경제가 흔들릴 것 같아 불안하다. 그렇다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생존과 성공의 비결이 무엇일까?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브 코비 박사는 원칙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원칙의 중심이란 성실, 근면, 검소, 신용, 정직, 팀워크 등 같은 원칙이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가장 잘 나열되어 있는 책이 성경이다. 이 책은 수만은 사람을 변하게 했으며 인류역사를 이끌어온 살아 있는 동력이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다. 믿음이 있는 싸움은 희망이 있다.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 일 때도 온몸 던진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다. 벼랑 끝에도 희망이 있듯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당신의 문제의 정답을 책에서 발견하자. 인간이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성경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사랑으로 연대하여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고 이끌어가는 당당한 주역이 되자.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천상병씨의 歸天(귀천) 이란 시가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는 이 세상을 소풍 왔다고 생각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삶이 마치 소풍 온 듯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에게 돌아갈 하늘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한편으로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아야한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인생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고 인간을 무뢰하게 만든다. 방자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죽음을 기억해야 인간은 진정한 지혜자가 되고, 겸손한 인간으로 바뀌어 질수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참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헛된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성경(골 3:2)에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전도서)한다.
서기 79년 8월24일 폼페이를 순식간에 덮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폭발이 일어나기 전부터 종종 연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품고 있었던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한다고 낭만적인 생각을 했을 것이다. 16년 전 폭발한 사실에 대해서 이미 사람들 머리에서 잊어졌던 것이다. 충분히 대피 할 수 있었건만 그들은 무관심했거나 너무 무지했던 것이다.
드디어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산이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순식간에 폼페이 최후의 날을 맞이했던 것이다. 화산 폭발의 전조를 보면서 무심했던 폼페이 시민들처럼 오늘날 지구촌의 시민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가는 현상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무방비 상태로 최후의 날을 맞이한 폼페이 시민들의 끔찍한 불행이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찌 재현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봄페이의 최후의 날을 통해 죽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스콜브 목사님의 글 중에 죽음의 연습이란 것이 있다. 청년 때 죽음의 연습은 정욕에 빠지지 않게 해주며, 중년 때 죽는 모습의 연습은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지 않게 해주고, 노년 때 죽음의 연습은 그로 하여금 거룩한 삶 가운데서 죽음 을 맞이할 수 있게 해준다. 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삶을 살찌게 하고 영혼을 부유하게 하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양식이 되고, 삶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오늘도 열심히 “마음의 양식”을 준비하고 있다. 천상병 시인과 같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므로 삶을 풍성케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 왜냐하면 이는 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독서할 시간을 가지자. 삶을 풍성케 하는 지혜의 샘이기 때문이다. 명상의 시간을 가지신다면, 이는 기운을 북돋아주는 청량제가 된다. 기도의 시간을 가지자. 중국의 철학자 구양수의 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은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들을 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은 변화시킬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누구나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인생을 살면서 거창한 꿈을 꾸게 된다. 가족 기업 그 민족 그리고 세계가 그의 꿈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원대한 꿈이 개인 삶의 변화로부터 된다는 사실에는 별로 익숙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죽음을 앞둔 어떤 사람의 글이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를 넘었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네, 그래서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지.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에게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지.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어있는 나는 문득 깨달았다 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었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이네,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좀 더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 것을 이 세상 모든 변화는 내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네. 아름다운 이 세상을 원하는가? 나 자신이 먼저 변하자. 그리하여 가족이 변하고 내 주위가 변하여 나라가 건전해져 가는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들자.
우리의 변화와 성숙을 어렵게 하는 것은 습관의 타성에 빠진 우리의 게으른 모습 때문이다. 시인 천상병씨 같이 이 세상 소풍 왔다고 생각하자. 다시 말해 소풍 온 기분으로 삶을 즐기자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던 내가 어디에 있든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살 때, 이때 새로운 변화를 시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돌아갈 하늘이 있다는 희망을 갖고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는 밝은 미래의 주인공이 되자.
정직과 용기
진정한 참 용기는 어디서 생길까? 용기는 주머니 사정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고 풍요로운 생활속세서 용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돈 때문에 더 비겁해지고 초라해질 수도 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이 많다고 용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약해질 수 있다. 경험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자신이 없어질 수 있다. 환경이 좋다고 여건이 완벽하다고 해서 용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경우가 더 많아질 수가 있다. 오히려 환경이 어려워질 때 더 큰 용기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진정한 용기는 도덕성에 있는 것이다. 죄인에게 용기가 없다. 오직 정직만이 도덕성을 뒷받침한다. 양심의 가책속세서는 비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직의 결여로 용기마저 상실되는 안데르센의 작품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바 보
현명한 사람도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 그러나 바보란 그 경험을 통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적어 목록을 만단다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되풀이할 가능성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당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는 것은 당신은 바보가 아니라 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과소평가해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발휘 못하는 것이다.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못난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증거가 있어도 부정적인 자신의 모습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 승패는 兵家常事(실패하는 일이 흔히 있으니 낙심할 것 없다는 뜻)라고 한다. 승자와 패자의 한 가지 차이점은 승자는 패배를 거울삼아 자신의 단점을 고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으로 현실적응에 장애가 되는 자신에 대한 착각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능력을 잘 활용해 성공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패자는 결코 배우는 법이 없어 똑같은 실수를 자꾸 되풀이 할뿐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상대방을 존중하고(Respect), 보살피고(Care), 알고(know), 책임지는 것(Responsibility)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상대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이며, 상대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다. 즉 사랑은 받아주고 채워주고 덮어주는 것이다.
보람: 인간은 보람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일하는 보람, 고생하는 보람, 공부하는 보람, 애쓰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보람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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